미정갤에서 중국 관련 글은 대개 몇 가지 익숙한 서사로 빨리 수렴한다. 중국인이 무언가를 찍었거나, 불법 입국이 나왔거나, 미국 의회가 반중 메시지를 냈다는 식의 서로 다른 사건들이 “결국 중국이 다 들어온다”는 단일 위협 프레임으로 접힌다. 그런데 이번 백악관 메모는 그 프레임과 닮았으면서도 결이 조금 다르다. 이번에는 익명의 게시물이나 과장된 캡처가 아니라, 백악관이 직접 ‘미국 프런티어 AI 모델의 능력이 중국계 행위자들에 의해 대규모로 추출되고 있다’고 행정 문서 언어로 적어 냈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지금까지 미중 기술전쟁의 중심은 주로 칩, 장비, 수출 통제, 제재 명단이었다. 누가 어떤 GPU를 얼마나 들여가느냐가 핵심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한 단계 더 안쪽으로 들어온다. 미국이 AI 모델 자체의 능력과 보안 장치, 심지어 응답을 통해 노출되는 내부 정보까지 국가경쟁력의 일부로 보겠다고 선언한 셈이기 때문이다.
새로 확인된 사실은 ‘중국이 AI를 훔친다’는 구호가 아니라 백악관이 증류를 정책 대상 위협으로 올려놨다는 점이다
로이터와 CNBC에 따르면 크라치오스는 ‘Adversarial Distillation of American AI Models’라는 제목의 메모에서 미국 정부가 확보한 정보상, 중국을 중심으로 한 외국 행위자들이 미국의 프런티어 AI 시스템을 상대로 산업 규모의 증류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고 적었다. 메모는 이들이 수만 개의 프록시 계정과 탈옥 기법을 활용해 proprietary information, 즉 독점적 정보를 노출시키고 능력을 체계적으로 추출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증류’라는 단어다. 증류는 원래 더 큰 모델의 출력을 활용해 더 가벼운 모델을 학습시키는 일반적 기법이다. 크라치오스도 메모에서 정상적이고 합법적으로 쓰이는 증류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문제 삼은 것은 승인받지 않은 방식으로, 보안 장치를 우회하며, 경쟁사의 프런티어 모델에서 능력을 대규모로 복제하려는 행위다. 다시 말해 이번 메모는 기술 용어 하나를 곧바로 안보·산업 정책의 감시 대상으로 올려놓은 문서다.
왜 이게 무겁냐면, 미국의 보호 대상이 칩에서 모델 ‘능력’과 ‘출력’으로 확장됐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미국의 대중국 AI 통제는 비교적 눈에 보이는 물건을 다뤘다. 고성능 GPU를 누구에게 팔지, 어떤 반도체 장비가 중국으로 가는지, 어떤 클라우드 사용이 우회 수입이 되는지 같은 문제였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는 올해 1월 엔비디아의 H200 대중국 수출을 조건부 허용했고, 4월 22일에는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이 아직 중국 기업에 H200이 실제 판매되진 않았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번 메모는 질문을 바꾼다. 설령 칩을 못 가져가더라도, 미국 모델에 충분히 접속해 출력과 행동 패턴을 뽑아 내면 경쟁력을 상당 부분 압축 복제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문제의식이 전면으로 나온다. 이 순간부터 미국이 지키려는 것은 하드웨어만이 아니다. API 접근, 계정 진위, 로그 패턴, 안전장치, 응답 결과물 자체도 전략 자산이 된다. 칩 통제가 국경 관리였다면, 이번은 플랫폼 내부 출입 통제에 가깝다.
그래서 이번 국면은 단순 지재권 분쟁보다 ‘모델 경계선’의 군사화에 가깝다
이번 메모에서 특히 눈에 띄는 문장은, 이런 증류가 단지 값싼 모방품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안전 프로토콜을 벗겨 낸 모델을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이다. CNBC에 따르면 크라치오스는 증류된 결과물들이 원본과 비슷해 보이는 벤치마크 성능을 더 낮은 비용으로 내세울 수 있고, 동시에 보안 장치나 중립성·truth-seeking 메커니즘을 제거할 수 있다고 봤다.
이렇게 되면 사안의 성격은 ‘중국 회사가 미국 회사 IP를 베꼈다’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미국 행정부는 지금 적대국이 미국 모델을 본떠 더 싼 모델을 내놓는 행위를 경제 경쟁의 일부가 아니라 안보 위험이 섞인 역량 이전으로 재분류하고 있다. 이건 AI를 두고 벌어지는 규칙 싸움이 이제 특허나 저작권을 넘어, 국가 간 기술 우위의 방어선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뜻이다.
타이밍도 중요하다. 트럼프-시진핑 회담을 앞두고 나온 만큼 협상 카드 성격이 짙다
이번 메모가 더 흥미로운 건 발표 시점이다. 로이터에 따르면 트럼프는 5월 14~15일 베이징에서 시진핑과 회담할 예정이다. 이미 올해 1월 H200 대중국 수출을 조건부 허용하는 등, 트럼프 행정부는 완전 봉쇄와 제한적 거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 왔다. 그런데 정작 4월 현재 H200 실판매는 아직 막혀 있고, 그 사이 백악관이 중국발 AI 능력 추출 캠페인을 대놓고 문제 삼았다.
이 조합은 꽤 선명하다. 미국은 한편으로는 칩 판매를 협상과 거래의 도구로 남겨 두고, 다른 한편으로는 모델 도용·증류 프레임을 새 압박 명분으로 축적하고 있다. 즉 기술전쟁의 전장이 반도체 공급망 하나에만 묶여 있지 않다는 걸 보여 주는 셈이다. 앞으로 미중 협상은 “칩을 팔 것이냐 말 것이냐”만이 아니라, 미국 AI 기업에 대한 중국발 접근과 추출을 어떤 규칙으로 막을 것이냐까지 포함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물론 여기서 바로 ‘중국이 다 훔쳤다’고 단정하면 과장이다
주의할 점도 분명하다. 현재까지 공개된 것은 백악관의 주장과 정책 문서이지, 특정 중국 기업에 대한 기소장이나 법원 판결은 아니다. 크라치오스 메모는 외국 행위자들이 주로 중국에 기반한다고 적었지만, 어느 회사가 어떤 모델을 어떤 방식으로 복제했는지까지 구체적으로 공개하지는 않았다. 중국 외교부와 주미 중국대사관도 각각 편견을 버리라, 근거 없는 비난이라는 취지로 반발했다.
그래서 지금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두 가지뿐이다. 첫째, 미국 행정부가 이 문제를 공식 안보·산업 정책 어휘로 끌어올렸다는 점. 둘째, 그 결과 앞으로 미국 AI 기업의 API 접근 통제, 고객 심사, 프록시 계정 탐지, 출력 제한, 해외 이용자 검증이 더 공격적으로 강화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점이다. 반면 실제 침해 규모나 구체적 대상은 아직 추가 입증이 필요하다.
결국 이 뉴스의 핵심은 ‘중국 비판’이 아니라 미국이 AI를 어떻게 봉쇄 가능한 자산으로 다시 정의하느냐에 있다
미정갤에서는 이런 뉴스를 곧바로 “역시 중국은 다 훔친다”는 확인용 재료로 소비하기 쉽다. 하지만 그 반응만 붙잡으면 진짜 변화를 놓친다. 이번에 새로 열린 국면은 중국 욕설의 수위가 아니라, 미국이 AI 경쟁 우위를 지키는 방식을 칩 수출 통제에서 모델 접근 통제까지 넓히고 있다는 점이다. 기술 패권의 보호선이 하드웨어 경계에서 소프트웨어·출력·접속 행태의 경계로 이동하고 있는 셈이다.
그 점에서 이번 메모는 단순한 반중 성명보다 더 구조적이다. 미국은 이제 AI 모델을 서비스가 아니라 전략 자산처럼 다루기 시작했고, 그 자산의 ‘행동 복제’까지 적대적 추출로 규정하고 있다. 앞으로 미중 기술전쟁은 칩 공장과 제재 명단만이 아니라, 누가 어떤 계정으로 어떤 프롬프트를 얼마나 던질 수 있는지까지 포함하는 훨씬 미세한 통제의 싸움으로 갈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이번 백악관 메모의 무게는 “또 중국 때리기 나왔네” 정도가 아니다. 미국이 AI 모델의 능력 자체를 국경 없는 공산품이 아니라, 감시하고 잠가야 할 국가경쟁력의 핵심 자산으로 공식 재분류하기 시작했다는 점, 바로 거기에 이번 새 국면의 본질이 있다.
한 줄 결론: 백악관의 ‘중국 AI 증류 절도’ 규정이 보여 주는 진짜 새 국면은 미국이 반도체뿐 아니라 AI 모델의 출력·접근·행동 복제까지 국가전략 자산의 보호 대상으로 올려놓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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